[시론] 외교에서도 끈기가 조급함을 이긴다

입력 2022-08-24 17:19   수정 2022-08-25 00:18

2012년 류현진 선수가 LA 다저스에 입단할 때 이야기다. 그는 6년간 3600만달러의 대형 계약을 따냈다. 계약 성사의 일등 공신으로 ‘악마의 에이전트’라고 불리는 스콧 보라스가 꼽혔다. 그는 탁월한 정보력과 벼랑 끝 전술로 목표를 쟁취하는 협상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 내려갈 때 선수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류현진의 요구만큼은 보라스도 조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계약 포기를 고려하겠다는 다저스 측의 엄포에도 류현진은 버텼다. 결국 상대방이 양보했다. 류현진과 보라스의 완승으로 평가받은 협상이 최종 타결된 것은 협상 종료를 불과 30초 남겨둔 시점이었다.

외교 협상에서도 끈기는 조급함을 이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보자. 영화 ‘D-13’에서 잘 묘사했듯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외교 교섭과 해상 봉쇄 등 무력시위를 병용한 노력으로 소련을 돌려세웠다. 13일은 케네디가 시간을 혹독하게 인내하는 기간이었다. 소련에 대한 핵공격도 불사하겠다는 군부를 통제해 가며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소련을 협상으로 이끌었다.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은 협상에서 시간을 활용하는 데 능하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협상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시간을 협상의 흐름과 향배를 조절하는 지렛대로 활용해 협상력을 증대한다.

미국은 카우보이형 협상 스타일을 자랑한다. 데드라인을 제시하고 따르지 않을 경우 초래될 불이익을 거론하며 압력을 행사한다. 힘의 비대칭을 바탕으로 최후통첩도 불사한다. 중국은 ‘상대방을 미치게 만드는’ 만만디 전술로 유명하다. “흔들리지 않음을 산처럼 하라(不動如山)”는 말처럼 시간끌기의 명수다. 불리할 경우 협상 지연이나 결렬 카드를 자주 사용한다. 일본은 내부 이해그룹 간 합의와 막후교섭을 중시한다. 정식 회의 전에 실무자들이 모여 의견을 조정한다는 뜻의 ‘네마와시(根回し)’는 바로 합의 문화를 지칭한다. 러시아는 불곰과 같이 집요하고 공세적인 협상 스타일로 유명하다. 결렬과 밤샘 교섭을 자주 하면서 상대방의 진을 빼는 협상은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과정이다.

최근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 조치에 관한 사법부의 현금화 결정이 미뤄졌다. 대법원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의 특허권에 관한 현금화 명령 재항고 사건의 최종 판단을 늦춘 것. 한·일 간 미래지향적 파트너십 구축을 위해 노력 중인 우리 정부에 긴요한 시간을 허여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강제징용자 배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시간은 금이다. 주권 문제의 충돌 없이 사법부의 판결 존중과 일본의 책임 인정을 균형 있게 반영하는 입장을 마련하고 그것을 기초로 일본과 외교 교섭을 진행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피해 당사자와 국민을 진정성 있게 설득하기 위해서도 끈기 있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사법부의 결정이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줄지 불명확한 상태에서 우리 협상 담당자들이 느끼는 시간적 압박감은 상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인 마감 시한이나 목표 시한을 설정하고 해결을 서두를 경우 졸속 협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시간 제약에 쫓기는 협상가는 협상력이 약해진다. 앞의 예에서 본 것처럼 협상에서 중요한 양보나 타결은 마감시간 직전이나 이후에 이뤄진다. 심지어 마감시간 자체도 협상 대상이 될 수 있다.

시대적, 전략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한·일 간 관계 회복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무엇보다 과거사 문제에 관한 양국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협상 담당자들은 협상 시한이 초래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침착하고 끈기 있게 자신을 통제해 가며 협상력을 증대시켜야 한다. 관계 회복과 발전이라는 외교 안타를 치기 위해서는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 요기 베라의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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